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혁명/진행 과정 (문단 편집) === 1794년 7월 27일, 테르미도르 반동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historywarsweapons.com/Thermidorian_Reaction.jpg|width=100%]]}}}|| ----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와 국민 생활의 통제로 민심을 잃었고, 혁명가들도 초심을 잃고 권력의 남용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. 그 사이 반로베스피에르 성향의 '국민공회' 의원들은 은밀히 음모를 꾸몄고 1794년 [[7월 27일]],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세력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그를 생포한다. 이때 로베스피에르는 자살 시도 실패 혹은 그를 체포하러 온 [[프랑스 국가 헌병대]]의 [[사병]]들 중 하나인 메르다라는 [[헌병]]의 [[권총]] 사격으로 턱뼈가 날아간 걸 붕대로 대충 칭칭 묶어 놓은 처참한 형태로 잡혀 있었다고 한다(...). 메르다는 이후 [[육군]] [[장교]]가 되어 [[나폴레옹 1세]] 때 [[기병]] [[대령]]까지 진급했고, [[전사]]한 뒤 [[준장]]에 추서됐다. 로베스피에르 일파는 그날 바로 구속수감된 뒤 다음날 오전 바로 재판을 받았고, 그들 스스로가 했던 재판방식 그대로 변론조차 하지 못하고 전원 [[사형]]이 선고되었다. 아니 재판도 아니고 그냥 기소된 혐의를 언급하고 규정에 따라 사형을 선고한다고 선언한 게 전부였으며, '''단심제'''라 항소할 여지도 없이 그날 오후에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다. 이때 위에 소개한 생쥐스트도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[[단두대]]로 직행한다. 둘 다 자신들이 죽음으로 몰았던 [[루이 16세]]와 [[마리 앙투아네트]]와 같은 벌을 받았으니 아이러니하다. 그리고 죽기 전 다음 차례는 로베스피에르가 될 거라던 [[조르주 당통]]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. 그가 처형되는 날, 파리 코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구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. 이를 "테르미도르 반동(Thermidorian Reaction)"이라 한다. [[테르미도르]]는 [[프랑스 공화력]] 달력에서 11번째 달의 이름으로 7월 16일에 시작된다. 테미도르는 더운 달이라는 의미이라 이를 "열월(熱月)" 반동/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.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, 반대파들은 그냥 사람 몰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찾아가서 한 명씩 잡아왔다고 한다. 혁명 정부의 지지세력이자 보호막이 되어야 할 파리 시민들도 철저히 자코뱅을 외면하였고, 오히려 자발적으로 자코뱅 당원들의 행방에 대해 신고했다. 하지만 로베스피에르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, 로베스피에르만 공포정치에 대해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. 사실 테르미도르 반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도 공포정치에 열중하다가 자신의 잘못으로 로베스피에르에 눈에 난 자들도 있었으니... 그의 사조직이라 알려진 공안위원회는 실상 그의 사조직이 아닌 데다가,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동자들 중 상당수가 공안위원회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